강남권 재건축 사업이 속도를 내면서 조합원들의 이주 문제가 추석 밥상머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수천 가구가 살던 집을 비우고 새 거처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녀의 학교와 직장, 익숙한 생활권을 고려해 인근에 머물고 싶어도 전셋집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서울 외곽이나 경기 지역으로 옮기면 출퇴근과 통학 등 생활 전반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는 전체 3930가구 규모로, 내년 3분기 이후 이주 시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거주 조합원 약 1800명을 제외하면 2100여 명의 거주 조합원이 새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
조합이 최근 제시한 이주비 방안을 보면 자금 선택지는 다양하다. 종전자산평가액이 40억 원인 조합원이 보증금 20억 원인 전셋집으로 옮길 때, 기본 이주비 6억 원에 시공사 보증을 통한 추가 이주비 14억 원을 더해 보증금 전액을 마련할 수 있다. 잠실주공5단지 전용면적 84㎡의 종전자산평가액은 현재 40억 원 안팎으로 책정되고 있다.
기본 이주비는 정부의 주택담보대출 한도에 따라 최대 6억 원까지 가능하다. 추가 이주비는 종전자산평가액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 100% 범위에서 실제 이주할 주택의 임차보증금을 한도로 받을 수 있다. 다만 추가 이주비 금리는 기본 이주비보다 1%포인트 이상 높게 형성돼, 대출 규모가 커질수록 금융비용도 늘어난다. 조합원은 대출을 늘려 기존 생활권에 남을지, 부담을 줄이고 외곽으로 옮길지 결정해야 한다.
20억 원 있어도 문제는 전셋집…84㎡대 매물 310건
잠실에 남는다면 자금 면에서는 선택지가 있다. 잠실르엘 전용 84㎡ 전세 호가는 18억 원대이고, 잠실래미안아이파크는 14억16억 원, 엘스·리센츠·트리지움은 13억15억 원 선이다. 조합이 제시한 20억 원 사례를 기준으로 보면 잠실의 신축·준신축 아파트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걸림돌은 가격보다 매물이다. 부동산 데이터업체 콕집이 네이버부동산 등록 매물에서 동일 주소의 중복 광고를 제외해 집계한 결과, 이달 19일 기준 잠실 주요 7개 단지의 전세 실매물은 528건이었다. 이 가운데 전용 84㎡대는 310건에 그쳤다.
단지별 전용 84㎡대 전세 실매물은 잠실르엘 23건, 잠실래미안아이파크 4건, 리센츠 21건, 트리지움 4건이었다. 상대적으로 매물이 많은 잠실엘스와 파크리오도 각각 127건, 111건 수준이다. 신축 단지의 전체 실매물은 잠실르엘 33건, 잠실래미안아이파크 56건으로 집계됐다.
잠실주공5단지 이주가 전세시장에 미칠 영향은 이주 가구 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전세보증금으로 20억 원 안팎을 마련할 수 있는 ‘구매력 있는 이주 수요’가 어디로 향하는지가 관건이다. 일부 조합원만 학군과 직장 등 기존 생활권을 지키기 위해 잠실에 남더라도 신축·준신축 등 선호 단지의 전세 매물에 수요가 몰릴 수 있다.
잠실주공5단지 인근 중개업체 대표는 학군이나 생활권을 이유로 높은 비용을 감수하고 주변 단지를 찾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연령대가 높은 조합원은 기본 이주비에 자금을 보태 서울 외곽이나 경기 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주지는 금융비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수요를 받아낼 매물 여력이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은마·개포도 이주 준비…구매력 있는 수요 향방 주목
이주 고민은 잠실주공5단지에만 국한되지 않을 전망이다. 최근 강남권 대형 정비사업 수주전에서는 이주비 지원 규모가 주요 경쟁 조건으로 떠올랐다. 건설사들은 LTV 100~150% 수준의 추가 이주비를 잇따라 제시하고 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조합이 이주비 조건을 우선순위로 요구하는 만큼 건설사들이 LTV 150% 수준까지 제안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4424가구 규모 대치 은마아파트와 1960가구 규모 개포주공6·7단지도 내년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 은마아파트 인근 중개업체 대표는 은마가 내년 초 관리처분인가를 계획하고 있어 대치동에서 가장 이른 이주가 예상된다며, 추석 연휴 뒤 조합원들이 본격적으로 이주를 고민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주자금을 확보한 강남권 재건축 조합원들이 기존 생활권에 남기 위해 신축·준신축 전세를 먼저 찾으면, 기존 임차 수요가 송파구 다른 지역이나 서울 동남권,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연쇄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양지영 신한 프리미어 패스파인더 전문위원은 이주비 부족보다 수요를 흡수할 물량이 남아 있는지가 문제라며, 인접 지역 수요가 밀려나 젠트리피케이션처럼 외곽 도시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추석 이후에는 이주 수요와 맞물린 임대차시장 움직임이 매매시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김효선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매매시장 금융 규제가 강화될수록 임대차시장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세가격과 전세 매물에 따라 일부 실수요자는 매매시장으로 이동하고, 매수 여력이 부족한 수요자는 월세시장으로 옮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