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회가 정비사업 공사비 검증을 강화하는 가운데 서울시는 조합이 검증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서울시는 검증에 걸리는 시간과 수수료를 이유로 들었지만, 자체적으로 도입한 의무검증을 3년도 지나기 전에 자율화하는 것은 정책 방향이 엇갈린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서울시는 공사비 검증에 통상 60일에서 최대 75일이 걸리고 별도 수수료도 들어 정비사업이 지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검증이 사업기간만 늘리고 공사비 분쟁을 해소하지 못했다면, 의무화의 실효성이 낮았다는 점을 서울시가 인정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의무화했던 공사비 검증, 조합 선택으로 바뀐다
서울시는 2023년 12월 ‘공공지원 정비사업 시공자 선정기준’을 개정해 공공지원 대상 정비사업의 공사비 검증을 의무화했다. 2023년 12월 28일 이후 시공자 선정 입찰공고를 한 조합은 사업시행계획인가를 받은 뒤 조합원 분양공고를 하기 전까지 전문기관에 검증을 요청해야 했다. 법정 증액률에 미달하거나 조합원의 별도 요구가 없는 경우에도 검증을 받도록 했다.
당시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 상승을 이유로 시공자들이 공사비를 크게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공사 중단과 입주 지연이 이어졌다. 서울시는 공신력 있는 기관의 검증을 통해 분쟁을 미리 막겠다는 취지로 의무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8월 12일 규제철폐안을 발표하며 공사비 검증을 조합이 사업장 상황과 필요에 따라 선택하도록 기준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공사비 증액이 크지 않거나 조합원이 검증을 요구하지 않는 사업장도 일률적으로 검증받으면 사업기간과 비용 부담이 커진다는 설명이다.
서울시는 법정 기준보다 강화해 도입한 안전장치를 시행 3년도 되기 전에 거둬들이게 됐다. 의무화 이후 분쟁이 얼마나 줄었는지, 검증으로 사업이 실제 며칠 지연됐는지, 검증 결과가 최종 계약에 어느 정도 반영됐는지에 대한 성과평가를 공개하지 않은 채 검증을 규제로 규정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검증 결과에 구속력이 없고 실제 계약에 반영됐는지 관리하지도 않으면서 처리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의무절차부터 없애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자율화에 앞서 검증범위와 자료제출 의무, 사후관리 체계를 먼저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국회는 적용 확대…서울시는 자율화
정부와 국회가 공사비 검증의 적용 범위를 넓히는 가운데 서울시가 의무검증을 조합 자율에 맡기는 것은 정책적으로 엇박자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8월 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주택법 개정안에는 공동주택 리모델링사업에도 공사비 검증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재개발·재건축과 달리 리모델링에는 법정 검증 절차가 없어 공사비가 올라가도 조합원이 객관적인 판단을 받기 어렵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개정법은 조합원 20% 이상이 요구하거나 시공자 선정 시점에 따라 공사비가 일정 비율 이상 증가하면 전문기관에 검증을 요청하도록 했다. 국회가 검증제도를 리모델링까지 확대하는 상황에서 서울시는 자체 의무검증을 폐지하는 방향을 택했다.
정부도 8·13 주택공급 대책에서 공사비와 인허가 갈등 등을 다룰 정비사업 전문 중재기구를 국토교통부에 설치하고, 중재 결과에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는 중재도 당사자들이 합의해야 성립한다. 조합이나 시공자가 중재를 거부하면 해당 효력이 발생하지 않아 실효성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검증을 거쳐도 공사비 분쟁은 계속
공사비 검증은 시공자가 제출한 설계도서와 물량·단가 자료를 바탕으로 공사비가 적정한지 판단한다. 시공자가 자료를 충분히 내지 않거나 금융비용과 공기 연장에 따른 손실 등이 검증 범위에서 빠지면 분쟁을 전부 해결하기 어렵다.
둔촌주공 재건축사업에서는 시공사업단이 추가 공사비로 1조1,385억원을 요구했지만, 한국부동산원이 제출 자료를 검증할 수 있다고 판단한 금액은 약 1,630억원으로 전체의 14%에 그쳤다.
공사 중단에 따른 손실과 금융비용 등 약 9,700억원은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실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조합과 시공사업단은 검증 결과만으로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 별도 협상을 이어갔다.
잠실진주아파트를 재건축한 잠실래미안아이파크에서도 검증 후 갈등이 계속됐다. 시공단은 당초 3.3㎡당 889만원을 요구했고, 조정과 협상을 거쳐 800만원대 공사비가 논의됐다.
조합은 증가분에 대한 변경계약을 의결했지만, 조합원들은 전체 공사비와 특화공사비의 세부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며 반발했다. 조합원 362명이 전체 공사비 재검증을 요구하는 등 검증과 협상을 한 차례 거친 뒤에도 갈등이 되풀이됐다.
현행 공사비 검증은 중복 물량이나 부적정 단가를 가려내는 계산 기능은 하지만, 시공자의 증액 요구를 억제하거나 분쟁을 끝내는 장치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