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뉴타운·재개발 출구전략의 하나로 도입된 가로주택정비사업이 위기에 놓였다. 소규모 사업의 낮은 사업성, 영세 시공사 참여에 따른 위험,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지원 축소에 정부 대출규제로 인한 미분양까지 더해지면서 사업 현장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준공 뒤 미분양이 발생하면 추가 분담금과 비용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도 나타난다. 사업자금을 빌려준 HUG와 시공사 등이 조합에 자금 회수 방안을 요구하면서, 일부 조합은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할인분양에 나서고 있다.
부천 B가로주택정비조합은 총회에서 최대 20% 할인분양을 할 수 있도록 의결했고, 우선 5% 할인분양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합원들은 가구당 수천만원의 추가 분담금을 부담할 처지다. 조합원이 3040명에 불과한 소규모 사업은 추가 비용을 나눠 부담할 인원이 적어 개인별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수백수천명의 조합원이 비용을 나누는 대규모 재개발·재건축 사업과 차이가 난다.
조합들은 HUG에 반환할 사업비뿐 아니라 매월 이자도 내야 한다. 시공사에 지급할 공사비 잔금은 지급기한이 지나면 지체상금으로 전환돼 높은 이자 부담이 생길 수 있다. 이를 감당하려고 제2금융권에서 연이자 5%가 넘는 자금을 빌리는 조합도 있다.
이주비 대출 지연에 사업 현장 자금난
착공을 앞둔 사업장에서는 이주비 등 사업자금 부족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조합들은 HUG가 관리하는 주택도시기금의 연 2.2% 저리 대출을 활용하려 하지만, 예산 한도에 막혀 대출이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서울 양천구 C가로주택정비사업조합은 사업시행인가와 관리처분계획인가를 받은 뒤 지난 3월 HUG에 주택도시기금 이주비 대출을 신청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답을 받지 못했다. 조합 측이 HUG 담당자에게 문의하면 예산이 소진됐으니 더 기다리라는 취지의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2020년 전후 HUG와 공공기관의 사업 참여 홍보를 보고 사업을 시작한 현장이 많아,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정부에 속았다는 불만도 나온다. 당시에는 필요 사업비의 90%까지 대출이 가능하고 한도도 없다는 안내를 받았다는 것이다.
C조합 관계자는 당시 사업만 시작하면 3~4년 안에 입주할 수 있고 사업비의 90%까지 HUG 대출을 받을 수 있어 자금 걱정 없이 새 아파트에 들어갈 기회라고 홍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책이 바뀐 뒤 대출이 제한되고 기다리라는 말만 듣게 돼 답답하다고 했다.
또 다른 조합 관계자는 대출이 늦어지는 동안 기존 사업비의 이자는 계속 발생하며, 주민들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이를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사업비를 빌린 상황에서 사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자만 내며 기다려야 하는 점이 억울하다는 설명이다.
HUG의 소규모 정비사업 융자 예산은 2019년 1,500억원, 2020년 3,870억원, 2021년 4,094억원, 2022년 3,114억원, 2023년 4,496억원이었다. 올해 예산은 4,430억원으로 책정됐지만, 사업 현장 증가에 비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장에서는 올해 신청해도 이듬해 대출받는 지연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다. 사업시행인가와 관리처분인가를 받은 뒤 이주비 대출을 위해 6개월에서 1년 이상 기다리는 사례도 거론된다. 사업 속도가 빠르다는 정부의 설명과 달리 공공기관의 자금 집행 지연으로 사업이 늦어지는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한 조합장은 HUG 자금 지원 시점을 알 수 없어 사업계획 일정을 세워도 실효성이 떨어지고, 사업 추진에 큰 장애가 된다고 말했다.
HUG는 기금 예산 소진에 대응해 건설비에 한해 보증서를 활용하고 위탁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조합들의 호응은 낮다. 기금 대출 금리가 연 2.2%인 데 비해 우리은행 위탁대출은 4.5% 안팎이기 때문이다. HUG는 이 가운데 2%의 이자 부담을 지원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조합들은 HUG 보증서 발급수수료와 우리은행 수수료 등 부가비용이 발생해 이중 부담이 생긴다고 보고 있다.
8·13 대책도 현장 기대에 못 미쳐
정부는 지난달 주택공급 확대를 위한 8·13 대책에서 가로주택정비사업 등 소규모 정비사업 지원 확대 방안을 발표했다. 대규모 재개발·재건축에 초점을 맞추면서 소규모 사업을 형식적으로 포함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책에는 총사업비 지원 비율을 현행 50%에서 60%로 높이고, 사업비 한도를 500억원에서 600억원으로 늘리는 내용이 담겼다. 초기 사업비는 융자 신청 순서가 아니라 착공 가능한 사업장을 우선 지원하고, 장기간 사업이 진행되지 않는 곳에서 자금을 회수해 사업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재배정하기로 했다.
공공참여형 사업의 사업비 지원 한도는 500억원에서 700억원으로 상향하고, 우리은행 위탁융자 상품의 2% 이자 지원 범위는 기존 건설비에서 이주비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단기 공급 차질 방지를 위해 2027년 사업시행인가를 받는 사업까지는 민간 조합 방식에도 같은 지원을 적용한다.
현장에서는 이 같은 지원 확대만으로는 사업성 부족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출규제로 일반분양이 막힌 상황에서 사업성 문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조합장은 2020년 전후 HUG와 공공기관의 홍보를 믿고 사업에 들어온 현장이 많다며, 사업비 지원 비율을 10%포인트 높이고 한도를 100억원 늘리는 것보다 한계에 놓인 사업장의 출구전략을 마련하는 일이 먼저라고 말했다.
중견 시공사, 서울 사업에 집중
위험이 커지자 도급순위 60위권 내 중견 시공사들은 수주 지역을 서울로 좁히고 있다. 수도권에서도 미분양 우려 등 사업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수주를 꺼리는 분위기다.
도급순위 60위권 D건설사의 수주 조건은 일반분양가 3,000만원 이상, 공사비 500억원 이상이다. 최소 신축 가구 수는 서울 강남권 130가구, 강북권 200가구로 정했다. 최근 공사비가 3.3㎡당 800만원을 넘는 상황에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수주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D건설사 관계자는 수도권 가로주택정비사업 수주 현장에서 도급순위 100~200위권 시공사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봤다며 시공사의 신용도와 부채비율 등 재정 능력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정비사업 전문가는 전국 사업의 추진 현황과 속도, 분양 경기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진행 중인 사업이 안정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출구전략을 포함한 종합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